반도체는 이제 단순한 산업재가 아닌, 국가 안보와 경제 패권을 좌우하는 전략 자산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글로벌 공급망 혼란과 미중 기술패권 경쟁 속에서, 반도체 자립을 국가 차원의 최우선 정책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CHIPS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자립 전략은 기술 확보, 생산 기반 강화, 법률·제도 정비를 삼축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단기적인 생산 확장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기술 독립과 산업 패권 확보까지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미국 반도체 자립정책의 추진 배경과 구체적 전략, 그리고 향후 전망을 살펴봅니다.
1.기술확보: 첨단 기술의 국산화와 연구개발 주도
미국의 반도체 자립정책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전략은 첨단 기술의 확보 및 국산화입니다. 과거에는 팹리스(설계) 중심의 구조로 비교적 설계력에 강점을 가졌던 미국이지만, 실제 제조 기술과 장비 분야에서는 아시아에 의존해왔습니다. 팬데믹 이후 공급망 불안정, 중국의 기술 부상 등이 본격화되면서 미국은 고부가가치 반도체 기술을 직접 보유하고자 하는 강력한 정책 전환을 시작했습니다.
CHIPS and Science Act(이하 CHIPS법)는 기술확보에 총 132억 달러 이상의 예산을 배정하며, 첨단 반도체 공정, 3D 패키징, AI 및 고성능 컴퓨팅용 반도체, 양자 반도체 등에 대한 연구개발(R&D) 투자를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텔, IBM, 마이크론 등 미국 내 기술 선도 기업뿐만 아니라 대학·연구기관과의 협력도 강화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IBM은 뉴욕에서 2nm 공정 시제품 개발에 성공하였고, 이는 미국 기술 자립의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은 국방·항공우주·에너지 분야의 특수 반도체 기술 확보를 위해 DARPA, DOE, NASA 등 정부 기관 주도의 기술 연구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는 민간 부문과 공공 부문의 협력을 기반으로 한 ‘공공-민간 기술 생태계’ 구축을 목표로 하며, 장기적으로는 국방과 산업 전반의 기술 독립성을 강화하게 됩니다.
기술 확보는 단순한 연구 투자에 그치지 않습니다. 미국은 외국인 투자심의위원회(CFIUS) 규제를 통해 해외 기술 인수 시 기술 유출을 방지하고 있으며, 첨단 반도체 관련 기술을 전략물자로 규정해 수출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규제 장치는 기술확보를 보완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미국의 기술 자립 전략은 공급망 단절을 넘어 글로벌 기술질서를 재편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2.생산기반: 제조 역량 복원과 지역 클러스터 전략
기술 확보와 더불어 미국 반도체 자립정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영역 중 하나는 생산기반 복원입니다. 미국은 1990년대까지 전 세계 반도체 생산량의 37%를 차지했지만, 현재는 10% 이하로 급감한 상태입니다. 이에 따라 미국은 ‘국가 안보 차원의 제조 기반 회복’을 목표로, 대규모 투자 유치와 팹(fab) 구축을 장려하는 정책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CHIPS법은 약 390억 달러를 생산시설 구축 지원에 할당하고 있으며, 이는 인텔(오하이오), TSMC(애리조나), 삼성전자(텍사스), 마이크론(뉴욕) 등 글로벌 기업들의 미국 내 팹 건설을 견인하는 주요 동력으로 작용했습니다. 이들 프로젝트는 5nm 이하 첨단 공정부터 D램, 낸드플래시, 특수 메모리까지 다양한 제품군을 포함하고 있어, 미국 반도체 생산 기반의 폭과 깊이를 동시에 확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지역 클러스터 전략입니다. 애리조나, 텍사스, 뉴욕, 오하이오 등은 반도체 제조와 관련한 인프라와 교육기관, 연구소, 협력 기업 등을 한데 묶는 클러스터형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주정부 차원에서도 토지 무상 제공, 전기·수도 인프라, 세금 감면 등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방 분산형 전략은 단순한 제조 집중을 넘어 지역 경제 활성화와 지속 가능한 산업 생태계 조성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생산기반 확충은 인력 수요와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 생산 기술자, 엔지니어, 장비 전문가 등 수만 명의 인력 양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커뮤니티 칼리지 및 전문대학과 협력하여 반도체 특화 교육 과정을 신설하고 있습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생산기반 안정화에 기여하며, 미국 내 반도체 산업 전반의 자급률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3.법률: 기술 보호와 산업 육성을 위한 입법적 기반
미국의 반도체 자립정책을 뒷받침하는 법률 체계 역시 매우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CHIPS법 자체도 입법을 통해 마련된 핵심 정책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법률과 규제를 통해 반도체 산업 전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기술 보호, 외국 투자 통제, 보조금 조건화 등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미국은 ‘전략 기술 보호’를 위해 반도체 기술을 수출통제 대상으로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상무부 산하 산업안보국(BIS)이 주도하는 전략으로, 14nm 이하 공정 장비 및 설계 소프트웨어 등 첨단 반도체 기술을 중국 등 특정국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한, CHIPS법에는 보조금을 받은 기업이 향후 10년간 ‘우려 국가’에 반도체 생산을 확대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외국인 투자 통제 강화입니다. 미국 재무부 산하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CFIUS)는 반도체 관련 기업이 해외 기업에 인수되거나, 외국 자본이 지배적 투자자로 들어올 경우 이를 제한하거나 차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법률은 미국 내 핵심 기술이 해외로 이전되는 것을 방지하며, 기술 자립을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기반을 제공합니다.
세 번째는 보조금에 대한 조건부 규정입니다. CHIPS법에서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공급망 투명성, ESG 기준, 노동자 보호, 지역사회 기여 등을 충족해야 하며, 그 내용을 준수하지 않으면 보조금 회수, 제재 등의 조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법률은 단순한 지원이 아닌 ‘책임 있는 성장’을 유도하고 있으며, 반도체 산업의 지속 가능성과 신뢰성을 함께 확보하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미국은 반도체 인력 양성법, 기술이전 금지 조항, 산업 보호를 위한 관세 정책 등 다각적인 입법 프레임을 통해 반도체 자립정책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입법 기반은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민간과 공공의 역할을 명확히 분리하며, 국제적 경쟁에서 미국이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4.결론: 요약 및 Call to Action
미국의 반도체 자립정책은 기술확보, 생산기반 구축, 법률 정비의 세 축을 중심으로 전략적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산업 육성을 넘어 국가 안보, 글로벌 패권,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한 장기 프로젝트입니다. 미국은 이를 위해 민관 협력, 국제 기술동맹, 입법적 지원을 통합하며 종합적인 접근을 하고 있으며, 이러한 구조는 다른 국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한국을 포함한 글로벌 반도체 이해관계자들은 이 흐름을 정확히 분석하고, 협력과 경쟁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